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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면 역사 시간 순삭

대담한 전사, 알렉산더 대왕의 극적인 원정과 그의 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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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의 놀라운 출발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56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 에피로스의 공주 올림피아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과 과학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를 진정한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은 철학적인 지식이 아닌 그의 전술적 천재성과 끊임없는 야망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20세에 마케도니아의 왕위에 올라서자마자,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수립한 군대를 바탕으로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불과 13년 만에 당시 고대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중 한 명으로 남았습니다.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몰락

알렉산더의 첫 번째 목표는 그의 아버지가 준비해 둔 대로 페르시아 제국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의 위협을 처음에는 과소평가했지만, 알렉산더의 뛰어난 전략과 용맹스러운 군대는 빠르게 페르시아의 핵심 영토를 점령해 나갔습니다.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치며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리우스는 도망쳤고,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으며 큰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를 차례대로 점령하며 페르시아 제국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알렉산더와 아시아의 만남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알렉산더는 더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중앙아시아로 진격하여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 북부까지 정복했습니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더는 인도의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 인도 왕 포로스와 맞붙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포로스의 코끼리 부대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지만, 인도에서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고, 그의 군대도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알렉산더는 더 동쪽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지만, 지친 병사들의 반발로 인해 결국 인도에서의 원정을 멈추고 돌아가야 했습니다.

숨겨진 로맨스와 인물 관계

알렉산더의 원정 중 그의 사생활도 역사 속에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알렉산더는 여러 번 결혼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인물은 페르시아의 공주 록사나였습니다. 록사나는 알렉산더가 바쿠트리아 지역(현재의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인물로, 그녀와의 결혼은 정치적 동맹뿐만 아니라 알렉산더의 개인적인 사랑도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알렉산더는 친구이자 전우였던 헤파이스티온과의 관계로도 유명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을 넘은 깊은 유대감을 보여주었으며,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은 알렉산더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는 알렉산더가 그의 죽음을 너무나도 슬퍼하여 대규모 장례식을 치르고,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헬레스폰트에서 에게 해에 이르는 성대한 행사를 개최한 사실로도 증명됩니다.

신화와 현실: 알렉산더의 신격화

알렉산더 대왕은 살아있는 동안 이미 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에는 이집트의 신 아문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는 이집트에서 파라오로 즉위하며 그의 신성한 통치를 선언했습니다. 알렉산더의 이러한 신격화는 그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닌, 신적인 존재로서 군림하고자 했던 야망을 보여줍니다.

알렉산더의 죽음과 제국의 분열

그러나 알렉산더의 제국은 그가 죽은 후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는 바빌론에서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여러 가설이 존재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의 사망 후, 그의 제국은 네 명의 장군들, 즉 디아도코이들에 의해 분할되었고, 알렉산더의 거대한 정복지는 더 이상 통일된 제국으로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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